지식에 대한 고픔이 먼저다 

한 근 태(한스컨설팅 대표, 미국 애크런대학 공학박사)

배움의 최대 장애물은 무엇일까? 나는 겸손을 가장한 자기비하,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시장이 밥맛이다."란 속담이 있다. 시장하면 뭐든 맛있고 시장하지 않으면 진수성찬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고픔이란 참 중요하다. 배가 고파야 음식이 맛있는 것처럼 돈에도 고픔이 필요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부자였던 사람과 가난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돈에 대해 느끼는 것이 다르지 않을까? 금수저들은 돈이 귀하다는 것, 돈 벌기 어렵다는 것, 노력의 결과로 돈이 생겼을 때의 기쁨 등을 알기 어렵다.

난 평생을 어렵게 지내다 50세가 지나면서 조금씩 살림이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이 정도 사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형편이 나아지니 돈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크다. 돈처럼 공부에도 배고픔은 필요하다. 난 별 관심이 없는 공학 공부로 박사까지 받았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했고 먹고 살기 위해 공부했다. 당연히 공부의 즐거움은 알지 못했다. 꾸역꾸역한 셈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문학 책을 읽고 소개하고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공부하는 기쁨을 알았고 그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서 커지고 있다.

요즘은 공부하는 게 제일 즐겁고 기쁘다. 그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 아마 내 안에 공부에 대한 갈증이 컸던 것 같고 뒤늦게 갈증을 채우는 방법을 안 것 같다. 뭐든 고픔과 갈증이 있어야 한다. 부족함과 갈급함이 있어야 채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난 평생 공부에 굶주리고 그걸 채우면서 살고 싶다.

후적박발(厚積薄發)은 두텁게 쌓아 살짝 드러낸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한 말이다. 쌓는 것이 먼저이고 드러내는 것은 나중이다. 레퍼런스가 두터우면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게 된다. 낭중지추와 통한다. 반대로 아는 게 없으면 시끄럽긴 한데 쓸 만한 내용이 없다. 쌓지는 않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자꾸 아는 척을 한다.

소동파는 부자가 농사짓는 것과 가난한 사람이 농사짓는 것을 이렇게 비유한다. 부자는 여유가 있으니까 땅을 놀려가며 농사를 짓는다. 당연히 땅에 힘이 있고 곡식이 잘된다. 가난한 사람은 땅을 놀릴 틈이 없으니 땅에 힘이 없고 좋은 씨앗을 뿌릴 여유도 없다. 참고 기다릴 여유도 없다. 늘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부가 먼저일까? 여유가 먼저일까? 순서를 정하기 어렵다. 여유가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고, 공부를 하면 여유가 생기면서 선순환이 일어난다. 반대로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여유가 없으니 공부하기 어렵고 그동안 배운 알랑한 지식을 방전하면서 근근이 먹고산다. 여유가 생겨도 공부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 먹고살기 위한 공부는 엄격한 의미의 공부가 아니다. 재미도 없고 억지로 할 가능성이 높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유가 있을 때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럼 자신을 채울 수 있고 채운 걸 통해 부를 만들 수 있다.

공부의 목적 중 하나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다. 일명 무지의 지다. 난 책을 읽고 소개하는 직업을 가진 지 20년이 넘어간다. 누구보다 많은 책을 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그렇게 많이 읽는데 읽을수록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궁금한 것과 알고 싶은 게 계속 늘어난다. 반대로 생전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어 보인다. 요즘 같은 영상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한다. 과연 그럴까?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무지의 지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달라진 건 딱 하나다.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내가 참 마음에 든다. 적어도 난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