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한 근 태(한스컨설팅 대표, 미국 애크런대 공학박사)

친구들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학교수인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얼마 후 어머니가 미수(米壽, 88세 생일)를 맞아, 가족들을 다 불러 잔치를 하고 장남인 내가 가족들 앞에서 축사를 싶은데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큰일이야. 연세가 88세지만 아직 총명하고 똑똑하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이 좋을까?"

그 말을 들은 한 친구가 “명정(明淨)이란 단어가 어때?” 하고 답했다. 나도 그랬지만 당사자 역시 그 단어가 딱 좋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엔 귀 밝을 총에 밝을 명의 총명 이란 단어를 생각했는데 눈이 초롱초롱하고 귀가 밝은 똑똑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라 왠지 윗사람에게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그런데 명정이란 말은 비슷한 단어지만 뭔가 있어 보이고 윗사람에게 쓰기도 좋은 것 같다면서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어휘력으로 옮겨갔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동창 모임이었기에 1975년도에 치른 서울대학교 국어시험 1번 문제가 뭔지 기억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기억을 못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난 이상하게 1번 문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라는 뜻의 사자성어를 묻는 문제였다. 난 자동으로 회자정리(會者定離)가 생각났고 기쁜 마음으로 답을 쓰면서 시험에 붙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맞았다.

내가 ‘회자정리' 이야기를 하자 한 친구가 그 말의 반대말이 뭔지 아느냐고 질문했다. 아무도 답하지 못하자 그가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며 답을 알려주었다.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뜻이란다. 다들 감탄했다. 이어 어휘에 관한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친구는 원래 문과였는데 원하지 않는 공대를 다녔고 적성에 맞지 않은 탓에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문학서적을 읽었단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공대수업 대신 영문과에서 여러 학점을 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휘력이 풍부했다.

내가 사회초년생이었을 때 외국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commitment'란 단어가 등장했는데, 그 단어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그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도 그 친구가 정확하게 의미를 설명해 감탄했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와의 대화는 늘 즐겁다. 아는 것도 많고 표현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어휘는 '말의 무리'라는 의미로 '단어의 총합을 뜻한다. 어휘는 당연히 중요하다. 오랜만에 본 사람이 멋지게 달라졌을 때 당신은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휘력이 빈약한 사람은 “이야!”, “대박!”, “대단한데!” 정도 수준의 말만을 반복할 것이다. 더 이상의 표현을 하고 싶어도 마땅히 쓸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은 “야, 이 친구 괄목상대할 만큼 달라졌는데”라고 할 것이다.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본다는 의미다.

예전 일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친구에겐 뭐라고 할 것인가? 나 같으면 “Let by gone, be by gone."이란 영어 격언을 말해줄 것 같다. 이는 비즈니스에서도 유리하다. 내가 아는 경영자는 외국 바이어와의 미팅에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걸 영어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 바이어가 예전에 큰 물량을 사기로 했다 취소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일이 반복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옆에 있던 지인이 “Once bitten twice shy."가 어떠냐고 물어봤다. 예전에 한번 쓴맛을 본 경험이 있으면 두 번째 할 때 쭈뼛거리게 된다는 영어 격언이다. 딱 맞는 표현이었다.

인간의 역량은 표현력에 달려 있고 그걸 좌우하는 게 바로 어휘력이다.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건 다양한 무기를 손에 쥔 것과 같다. 독서를 하면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단어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 단어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고 이는 곧 사고의 확대로 이어진다. 사고가 확대되면 예전보다 많은 가능성이 있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공부를 한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어휘력을 넓이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현재 내 어휘력은 어느 수준일까? 어느 수준까지 올려야 할까?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어휘력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